안필로지노 과리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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개인 정보 | ||||||||||||||||||||||||||
본명 | Amphilóquio Guarisi Marques | |||||||||||||||||||||||||
출생일 | 1905년 12월 6일 | |||||||||||||||||||||||||
출생지 | 브라질 상 파울루 | |||||||||||||||||||||||||
사망일 | 1974년 6월 8일 | (68세)|||||||||||||||||||||||||
사망지 | 브라질 상 파울루 | |||||||||||||||||||||||||
키 | 1.83m | |||||||||||||||||||||||||
포지션 | 은퇴 (과거 공격수) | |||||||||||||||||||||||||
구단 기록* | ||||||||||||||||||||||||||
연도 | 구단 | 출전 (득점) | ||||||||||||||||||||||||
1922–1924 1925–1928 1929–1931 1931–1936 1937–1939 1939–1940 1940 |
포르투게자 파울리스타누 코린치앙스 라치오 코린치앙스 포르투게자 팔레스트라 이탈리아 |
X (X) 50 (21) 134 (43) 24 (8) X (X) 5 (1) | 50 (21) ||||||||||||||||||||||||
국가대표팀 기록 | ||||||||||||||||||||||||||
1925 1932–1934 |
브라질 이탈리아 |
6 (1) | 4 (1) ||||||||||||||||||||||||
메달 기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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*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. |
앙필로키우 과리시 마르케스(포르투갈어: Amphilóquio Guarisi Marques; 1905년 12월 26일, 상 파울루 주 상 파울루 ~ 1974년 6월 8일, 상 파울루 주 상 파울루)는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축구 선수로, 현역 시절 공격수로 활동했다. 브라질에서 활동하던 시절에는 필로(포르투갈어: Filó)로 이탈리아 무디에서는 안필로지노 과리시(이탈리아어: Anfilogino Guarisi aɱfiˈlɔːdʒino ɡwaˈriːzi[*])로 알려진 선수였다. 그는 현역 시절에 브라질과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일원으로 모두 국제 대회에 출전한 경력이 있고,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일원으로는 1934년 월드컵 우승을 거두었다.
경력[편집]
상 파울루 출신인 과리시는 그의 부친 마누에우 아우구스투 마르케스가 회장을 역임하던 포르투게자에서 1922년에 신고식을 치렀다.
1925년, 그는 파울리스타누로 이적하여 전설적인 아르투어 프리덴라이히와 동행했다. 같은 해, 그는 유럽에서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에 득점을 ���두어 파울리스타누가 프랑스를 7-2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.
1925년 12월 6일, 그는 파라과이를 상대로 브라질 국가대표팀 첫 경기를 뛰었다. 경기 결과는 5-2였고, 필루는 이 경기에서 1골을 득점했다. 그는 1925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의 준우승을 거둔 선수단에 이름을 올렸다.
파울리스타누 소속으로, 그는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를 1926년에 우승했고,(그는 이 리그에서 16골로 득점왕에 등극했다) 1927년과 1929년에는 아마추어 축구 리그를 우승했다. 1929년, 그는 코린치앙스 소속으로 파울리스타 체육 협회(당시 상 파울루의 양대 축구 리그 중 하나) 리그를 우승했다. 1930년, 그는 코린치앙스에서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를 1번 더 우승했다.
그는 우루과이에서 열린 1930년 월드컵 선수단 발탁을 기대했지만, 히우 지 자네이루와 상 파울루 리그 간의 오해로 인해 히우측 선수만 이 대회에 참가했다. 필루, 프리덴라이히를 비롯한 상 파울루 리그 선수들은 우루과이로 가지 못했다. 상 파울루 리그 소속으로 유일하게 월드컵 선수단에 발탁된 선수는 산투스와 소송중이었던 아라켄뿐이었다.
1931년, 필루는 이탈리아의 라치오로 건너갔다. 그는 이탈리아에서 성씨인 과리시로 불렸다. 하양-하늘 군단(biancoceleste) 소속으로, 그는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가문 판토니 가문의 니낭, 니니뉴, 그리고 니지뉴와 한배를 탔고, 이들은 각각 판토니 1호, 판토니 2호, 판토니 3호로 수식되었다. 당시의 라치오 선수단은 "브라질라치오"로 수식되었다.
1932년, 이탈리아 모친을 둔 과리시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받아 1931-32년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었고, 1933-35년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에는 우승을 거두었고, 1934년 월드컵에서도 정상에 올랐으며, 그에 따라 브라질 태생으로는 월드컵을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. 이탈리아가 이 대회에서 치른 예선전(그리스와의 경기)에서, 과리시는 푸른 군단(Squadra Azzurra)의 첫 월드컵 예선전 경기에서 득점을 올렸다.[1] 이 경기에서, 그는 라치오 동료인 판토니 2호와 동반 출격했다.[1]
그는 1937년에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의 코린치앙스로 복귀했다. 그는 상 파울루의 이탈리아인이 운영하는 축구단 팔레스트라 이탈리아(현 파우메이라스)에서 마지막 파울리스타 우승을 거두었다.